1954년 7월 정부가 공포한 <한글 간이화안>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련의 문화적, 사회적 논란. 1933년에 조선어 학회가 형태주의적 정서법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자, 1954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종래의 음소주의적 정서법을 사용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1955년, 대통령은 맞춤법 문제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으며 민중이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약 2년에 걸친 한글 파동은 일단락되었다.
미국 남북 전쟁 때인 1861년에 북군이 무단으로 영국 선박 트렌트호를 점거하고 남부의 사절을 체포하여 벌어진 사건. 이 사건으로 북부는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를 얻으려던 남부의 의도를 사전에 막았지만, 영국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면서 거의 전쟁 직전까지 관계가 악화되었다.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북부가 남부의 외교 사절을 석방하고 영국에 사과하면서 일단락되었다. ⇒규범 표기는 미확정이다.
1928년에 함경남도 영흥 지방 노동자들이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벌인 파업. 일제 시대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흑연 광산 노동자들이 회사 측에 임금 인상 등의 요구를 하였으나, 회사는 경찰을 동원하여 탄압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영흥 전 지역의 노동자들이 연달아 총파업을 선언하고 시위에 나서고 시민들까지 가세하자, 경찰이 직접 중개에 나서 회사에서 처우 개선의 약속을 받아 내면서 일단락되었다.
1925년 형평사 예천 분사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형평사원들과 일반인들이 충돌한 사건. 이 사건은 반형평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일간지에 사설이 실리면서 전국의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가 충돌 원인의 제공자인 예천 청년회장 김석희(金碩熙) 외 23인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것과 함께 벌금을 물리면서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전국의 각 사회단체와 형평사 간의 유대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다.